당신은 창의적 천재로 태어났다. 취학하기 전에, 유치원 다니기 전에, 당신은 천재였다. 마음껏 부르고, 쓰고, 그리고, 만들었다. 그 모든 것들이 비상한 것이었고 독창적인 것이었고 상상력으로 충만한 것들이었다. 발명가였고 가수였고 작곡가였고 화가였고 작가였고 시인이었다. 그것이 사실이었음은 내가 보증할 수 있다. 의심스럽다면 취학하기 전에 남겨놓은 그 모든 독창적인 작업들을 다시 꺼내 살펴보라. 학교라는, 더 근본적으로 교육이라는 괴물이 당신을 ‘4비트 CPU’로 만들어 놓기 전까지는 당신이 천재였다는 것을 내가 장담할 수 있다.
초등학교·중학교·고등학교, 중등교육 12년을 무사히 모범적으로 마쳤다면 이제 당신은 바보가 되었다. 이 바보는 순진무구한 천사라는 뜻이 아니다. 아무 생각이 없는 로보트같은 존재가 되었다는 것이다. 계산만 할 줄 아는 저성능의 CPU가 되었다는 말이다. 그 모든 찬란했던 재능은 난도질 당해서 잘려 나갔고 창의력, 창조적 상상력은 제대로 싹트기도 전에 짓밟혀 버렸다. 이제 그 흔적을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다. 12년 동안 교육받은 것은 계산의 기능적 숙련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이것보다 더 중요한 진실은 기성 체제와 규율을 몸과 마음에 내면화시켜, 자본의 이익에 순응적인 한 노동력 부품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1. 입시위주의 주입식 학교교육이 무덤의 본질이 아니다
오늘날 한국의 공교육의 문제점으로 품성교육의 실패, 입시위주의 주입식 교육이 상투적으로 지적된다. 그러나 학교교육-제도교육의 파행성이 문제의 본질이 아니다. 제도 보완으로 입시위주의 주입식 교육의 폐단이 해소되고 그럼으로써 학교교육이 정상화될 수 있다거나, 정상화된 학교교육은 전인적 인간의 완성이라는 본래적 교육이념에 근접할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교육체제와 사회적 지배질서의 함수관계에 대한 이해가 없는, 참으로 무지한 생각이 될 수밖에 없다. 암기력와 계산력만 숙련시키는 파행성은 사실 파행성이 아니라 제도교육-학교교육의 은폐된 목표의 한 항목이다. 국가의 교육정책이 겉으로 표방하는 전인적 인간의 완성이라는 수사여구는 단지 서류상으로만 존재하는 헛것이다.
2. 무덤의 본질은 학교 교육 그 자체에 있다
미국의 대안교육 운동가 게토는 ‘우리는 왜 교육을 받을수록 멍청해지는가’ 라는 화두로 쓴 《바보 만들기》라는 책에서, 학교교육, 즉 제도 공교육의 숨어 있는 가장 핵심적인 커리큘럼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바보 만들기’라는 과정이라고 말한다. 그 바보 만들기는 바로 창의성의 말살을 뜻한다.
학교는, 흔히들 알고 있는 것처럼, 배움이 이루어지는 곳이 아니다. 교실은 국민대중을 관리하고 통제하는 국가적 장치다. 학교제도는 산업문명 이래로 통제되고 체제순응적인 인간을 찍어내는 공장으로서 역할을 해왔다. 학교에서 자주적 개성과 창의력은 전혀 고려되지 않는다. 학생들에게 요구되는 것은 복종과 규율이다. 사람들은 학교를 다니면서 사회화되고 사회성이 길러진다고 굳게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러나 말이 좋아 사회성이지 그것은 사회성이 아니라 통제에 길들여지고 조직 속에 순응하는 자기검열의 내면화 과정일 뿐이다. 군대와 감옥과 공장과 학교는 결국 동일한 모델에서 나온 것들이다.
3. 학교교육의 숨겨진 커리큘럼
앨빈 토플러는《제3의 파도》에서, 신석기혁명(경작의 시작)으로 시작된 농업문명을 제1의 파도로, 17~18세기의 산업혁명으로 형성된 산업문명의 파도를 제2의 파도로, 20세기 중반 이후로 나타나기 시작하는, 지식정보를 기반으로 하는 새로운 문명의 변화를 제3의 파도로 표현하고 있다. 토플러는 산업혁명으로 형성된 공업사회의 핵심 장치로서 산업노동력을 양성하기 위한 학교교육을 지적하고 있다.
공업사회의 기반은 대중들의 공장노동이다. 이 공장노동을 효율적으로 규율하기 위해서 공장시스템을 모델로 하여 대중적 학교교육이라는 제도를 실시하게 된다. 학교의 교실에서 표면적인 커리큘럼으로서 초보적인 읽기·쓰기·셈하기를 익히게 하고 기초적인 상식을 가르쳤다. 그러나 그 배후에는 숨겨져 잘 보이지 않는 커리큘럼이 있으니, 그것은 시간엄수, 복종, 기계적 반복작업의 숙련이라는 과목들이었다. 이게 바로 근대적 학교교육의 진짜 목적이고 핵심이었다고, 토플러는 설명한다. 자주적 개성이나 창의성은 이 숨겨진 커리큘럼의 적이다. 제도 공교육의 대상은 계속 확대되어 7~8세까지 내려간다. 이런 대중교육 체제는 현재까지도 세계 대부분의 산업화된 국가들의 당연한 전제가 되고 있다.
19세기에 독일의 프로이센 정부가 국민통합과 통제를 목적으로 이른바 근대적 제도 학교교육을 고안해낸 이래로 전세계로 퍼져나갔다. 19세기후반에 서유럽 제국주의에 의해 강제 개항된 일본은 재빨리 독일식 국민교육을 수용해서 전국적으로 실시했고 조선을 침략·강점한 이래로 식민지 조선에까지 실시하게 된다. 이 과정이 현재 한국의 학교교육의 전사(前史)이다. 이전까지 원초적 형태의 교육기관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지배계층의 소수에게만 허용된 영역이었다. 오늘날처럼 미성년국민 전체에게 강제적이고 의무적으로 시키는 교육제도는 없었다. 말하자면 학교라는 형태는 근대 자본주의의 내적 필요에서 비로소 나온 고안물이었다. 자본주의 사회의 대공장제도에 맞게끔 국민대중의 육체와 정신을 통제하려는 지배계급의 기획이 근대적 대중교육의 장치로서 학교를 만들어냈다. 그리하여 학교는 지난 2백년간 지구상의 모든 산업화된 지역에서 본래 목적하는 바를 충실히 성취하는 대성공을 거두었다.
4. 창의적 배움은 학교 바깥에서 게릴라식으로 이루어진다
현재 한국의 제도교육 속에서 창의력을 살려낼 방도는 없다. 지난 200년 동안 대성공을 했기 때문에 학교시스템은 근본적 혁명을 허용하지 않는다. 대중들은 어렸을 때부터 다양하고 역동적인 학교바깥의 사회체험에서 격리된 채, 토막난 시간표 속에서 현실생활과 동떨어진 교과서들과 교과과정만 일방적으로 강제되고 주입된다. 그나마도 교육과정평가원에서 만든 교과서에 입각한 수업조차도 학교 현장에서는 거의 서류상으로만 행해지고 있다. 학교 현장에서는 수십년간 지속되어온 관행적 주입식 수업만이 되풀이된다. 배우는 이들의 자유롭고 창의로운 생각이나 발상을 키우고 그것을 표현하고자 하는 욕구는 전혀 고려되지 않는다. 모든 것은 이미 정해진 서류상의 교과과정에 맞추어야 하고 시간표를 맞추어야 하고, 그리고 장학사의 감독에 대비해서 서류상으로 구색을 갖출 뿐이다. 과학실이라고 있어봐야 거기서 하는 것은 시험문제 풀이밖에 없다. 이런 상황에서 무슨 과학적 창의성이나 예술적 창의성이 나오겠는가.
우리가 실제로 무엇을 배우는 과정은 현행 학교 교육제도의 틀인 시간표와 계단식 커리큘럼과는 거리가 멀다. 우리가 배우는 과정은 교육(education)보다 먼저 실제로 하기(doing)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교육의 결과로 우리가 뭔가를 배우는 게 아니라 실제적 활동을 통해서 학습하게 된다. 이것이 진실에 가깝다. 그러나 사람들은 마치 학교에서 어떤 커리큘럼을 통하여, 짜여진 시간, 특정한 공간 속에서 커리큘럼의 성실한 이행을 통해서 배우는 걸로 착각한다.
창의성이나 창의력은 자유로운 놀이와 우리가 무언가를 배우는 진정한 방식 즉 게릴라 학습에서 길러지고 확충된다. 그러나 제도교육에서는 이미 만들어진 커리큘럼이라는 틀을 학생들에게 강요한다. 그 틀에 맞지 않는 것은 모조리 배제된다. 아이들을 일정시간과 일정공간에 집단으로 모아 놓고 획일적으로 똑같은 시간에 똑같은 내용을 가진 수업이라는 형태는 사실 창의성과 창의력과는 근본적으로 이질적인 것이다.
창조적으로 생각하려면 머리에 여백이 많아야 하는데, 오늘날의 우리 학생들은 정해진 수업시간표로만 머리를 가득 채울 뿐만 아니라 그것도 모자라서 상업적 사교육 시간표까지 머리 속에다 가득 쑤셔 넣는다. 아이들의 마음과 머리 속에 더 이상 창의성의 기반이 되는 여유와 놀이가 없다. 끝없이 교과서 내용을 주입받고 주입된 결과를 확인하기 위해서 청소년기 대부분을 ‘먹어버린다.’
앨런 파커 감독이 만든 《The Wall》이라는 영화가 있다. 영국의 프로그레시브 락 밴드 핑크 플로이드(Pink Flyod)의 두 장짜리 더블 앨범을 영화로 만든 작품이다. 앨범 중에 가장 유명한 곡은 〈Another blick in the wall〉이라는 곡이다. 서태지의 〈교실 이데아〉도 여기서 힌트를 얻은 듯하다. 영화에서 아이들이 컨베이어 벨트에 의해서 차례로 운반되다가 소세지를 만들어내는 기계 속으로 하나씩 떨어져 들어간다. 그 기계를 통과한 아이들은 소세지가 되어 통으로 떨어져 나온다. 이 장면을 보면 바로 학교교육이 무엇을 하는지 극명하게 보여준다.
〈Another blick in the wall〉
We don't need no education.
We don't need no thought control.
No dark sarcasm in the classroom.
Teacher, leave those kids alone.
Hey, Teacher, leave those kids alone!
All in all it's just another brick in the wall.
All in all you're just another brick in the wall.
(우리에게 교육 따위는 필요없어요.
우리 생각을 통제하려 하지 말아요.
교실에서 역겨운 잔소리 좀 하지 말아요.
선생, 아이들 좀 내버려 둬요.
이봐요, 교사양반, 애들을 그냥 냅두라니까요!
그래봐야, 결국 벽 속에 벽 하나 더 얹을 뿐이라구요.
아무리 그래봐야, 결국 선생도 벽 속의 또다른 벽돌에 불과하다구요.)
※ 교육받는 우리도 거대한 통제체제의 부품일 뿐이고, 가르치는 교사도 그 통제체제의 부품일 뿐이라는 얘기다.